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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크레인이 나부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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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아파트 공사 현장에 서 있는 타워크레인(왼쪽)과 지난달 19일 양대 노총 기자회견장에 1월 한 달간 사망한 타워크레인 노동자를 추모하는 안전모와 영정이 놓인 모습. 뉴시스·뉴스1
심미성은 감각에 기반한다 여겨지지만, 리베카 솔닛에 따르면 명징성·정직성·정확성·진실성도 아름답다. 솔닛은 “그런 것들 가운데서 비로소 대상이 진실하게 재현될 수 있고, 앎이 민주화되고, 사람들이 힘을 얻고, 문들이 열리고, 정보가 자유롭게 이동하고, 계약들이 준수되기 때문”(저서 ‘오웰의 장미’)이라 했다. 순전히 탐미적인 문학보다 사회비판적 문학에 더 강력히 매료되는 경우도 그런 이유일 것이다. 아름다움은 윤리배반적이지 않다.
그렇다면 추한 글도 정의할 수 있다. 사람들의 힘을 뺏고, 문을 닫고, (공적) 계약들을 파기하는 글이다. 서울서부지법 난입 폭동을 법원 탓으로 돌리는 기사, 불법 계엄으로 국회 봉쇄가 시도된 마당에 대통령이 국회 해산권을 가져야 한다는 칼럼을 보라.
그중 내가 유독 참기 힘들었던 기사는 지난달, 한 신문 1면에 실린 ‘중대재해법 3년, 사상자 되레 늘었다’는 제목의 기사였다. 혼란과 불안의 시국 속에, 오랜 공격 대상(안전조치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영진을 처벌하는 중대재해법)을 살뜰히도 잊지 않은 기사다. 저널리즘의 위기로 완결성이 떨어지고 편파적인 기사들이야 흔하지만, 누군가 목숨이 달린 문제를 지속적이고 고의적으로 부실하게 취급한 때, 불쾌함은 배가되는 것 같다.
‘산재 사망 증가→쓸모없는 중대재해법 폐지 필요’ 기사는 주기적으로 나온다. 문제는 전체 추세와 상관없이 업종별, 업체 크기별, 시기별로 쪼개서 언제나 ‘증가’를 찾아내서 쓴다는 점이다. 해당 기사도 상위 20위 건설사가 기준이었다.
이 기사가 보도된 뒤, 지난해 산업재해 사고(법위반 재해조사 대상) 사망자가 줄었다는 고용노동부 발표가 있었다. 이 내용은 다루지도 않고 조용하다가 또 어느 기간, 어느 업종을 특정해 늘어난 수치를 찾아내고 다시 중대재해법을 공격할 것이다. 중대재해법 도입 후 3년간 그래왔다.
설사 전체 산재 사망자가 증가한다 해도, 중대재해법의 ‘무쓸모’로 연결하는 건 위험하고 섣부르다. 혹시 경험 적은 외국인 노동자가 늘어서는 아닌가, 중대재해법이 그나마 사망자 증가폭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중대재해법 도입에도 여전히 집행유예가 남발되면서 실효성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닌가···. 고민하고 조사해야 할 지점은 들판의 봄꽃처럼 많다. 만약 일부 언론의 레퍼토리대로 중대재해법이 안전관리자에게 면피를 위한 서류작업에만 열중하게 한다면, 그 서류작업 과정을 개선하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또한, 목숨을 앗아간 중차대한 사건에서 ‘예방’이 아니라, 합당한 ‘단죄’로서 중대재해법의 가치는 없는가.
얼마 전, 양대 노총은 타워크레인 사망재해가 2021년 이후 연간 2, 3명 수준이었지만, 올해는 1월 한 달에만 4명이나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윤석열 정권의 국토교통부는 2023년 타워크레인 기사들에게 ‘순간풍속이 기준치를 초과했다는 이유로 원도급사의 승인 없이 조종석을 이탈한 경우’ 등을 불성실 업무유형으로 분류하고, 면허 정지를 시행하고 있다. 이로 인해 강풍으로 건자재에 타워크레인 유리창이 깨져도 작업을 이어간 사례도 있다고 한다. 정부가 안전기준을 안전하지 않게 바꿔 현장이 위험해진 것이다. 이런 산재 수치도 중대재해법 공격에 쓸 것인가.
나쁜 권력과 그 추종자들은 힘을 빼앗고, 문을 닫고, 계약을 파기하며 자신이나 소속 집단의 이익을 챙긴다. 그 결과로, 사람들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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