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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렌베리 가문의 신화와 의혹

입력
2025.01.20 04:3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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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라울 발렌베리와 그의 가문- 2

영국 런던 그레이트 컴벌랜드 플레이스에 서 있는 라울 발렌버그 동상. 위키피디아

영국 런던 그레이트 컴벌랜드 플레이스에 서 있는 라울 발렌버그 동상. 위키피디아

(이어서) 1856년 앙드레 발렌베리의 ‘스톡홀름 엔스킬다 은행(SEB)’ 창업으로 시작된 발렌베리 가문의 성공 신화는 1917년 설립한 가족 재단과 산하 여러 기업, 투자은행(Investor AB) 등을 통해 지금도 건재하다. 발렌베리 재단은 기술-과학 연구 및 다양한 자선사업 등을 통해 글로벌 산업과 금융, 통상뿐 아니라 유엔과 세계무역기구, 세계보건기구 등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사브(Saab)와 에릭슨 등 20여 개 회사 최대주주로서 스웨덴 인구 약 40%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거기에 라울 발렌베리의 존재는 재단의 박애와 휴머니즘, 즉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좋은 홍보 밑천이 돼왔다.

1989년 네덜란드 역사학자 제라드 알더스(Gerard Aalders)는 발렌베리 가문에 대한 약 10년간의 연구를 집대성한 책 ‘불굴의 사업- 발렌베리 가문(Business At Any Price- The Wallenbergs)’에서 2차대전 기간 엔스킬다 은행이 나치가 몰수한 유대인들의 미국 기업 채권 및 주식을 집중적으로 헐값에 매입해 자금 세탁을 거쳐 부를 축적했고, 독일 군수기업 '보쉬' 등을 도우며 나치 원자폭탄 개발 프로젝트에도 자금을 댄 전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45년 소련군이 라울을 스파이 혐의로 체포한 것도 가족의 전쟁 부역에 대한 보복일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추측했다. 라울이 미국 첩보원이었다는 구소련 등의 주장은 그를 발탁한 WRB 지부장 이브 올슨이 사실 전시 미 군사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 요원이었다는 점에 근거한다.

소련은 1956년 라울이 모스크바 내무인민위원회의 루비얀카 감옥에서 심근경색으로 47년 숨졌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다른 장소에서 그를 목격했다는 증언들이 이어지면서 소련의 공식 주장은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활동과 죽음의 진실은, 가문의 진실과 더불어, 아직 온전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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