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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폭력의 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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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연방하원 의사 진행을 유심히 본 적이 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토론이나 질의응답이 철저히 ‘의장을 끼고’ 이뤄진다는 점이다. 의원들은 격렬한 논쟁에서도 상대방을 직접 겨냥해 발언하지 않는다. 청자는 항상 의장이다. “의장님, 존경하는 상대 의원 주장은 논리에 맞지 않습니다.” 이렇게 의장에게 일러바치듯이 발언한다. 의장을 보고 말하니 공손해야 한다. 한국처럼 고성, 비아냥, 욕설이 오갈 일도 없다.
□ 캐나다 의원이 대한민국 의원보다 더 점잖아서일까? 아니다. 의사규칙(standing order)에 그런 조항이 있어서다. 활극이 난무하는 ‘동물국회’에 익숙한 한국인 입장에선 재미없을 수 있고, 이렇게까지 자유 토론을 제한할 필요가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한 대 맞으면 더 세게 받아치고 싶은 게 인간의 본성. 한 번 선을 넘으면 파국을 향해 치닫기 마련인 갈등의 본질을 감안했을 때, 이런 정화장치는 효과적 갈등 통제수단이 될 수 있다. 제도가 욕망을 제어하는 예다.
□ 자유민주주의는 다원주의를 지향한다. 그러나 갈등 극단화 방지 장치 역시 필요하다. 민주주의 국가가 대의제와 정당제를 통해 한 단계 더 정제된 ‘간접 공론의 장’을 펼치는 이유도 이런 ‘필터링’ 때문이다.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나라에서 이념 극단이 존재하는 건 이상하지 않지만, 극단 세력이 날것의 주장을 앞세워 직접 대결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도록 해선 안 된다. 갈등을 제도 안으로 끌고 와 절차에 따라 토론하고 결론 내는 게 정당의 사명이다.
□ 그런 측면에서 극단주의가 법원을 침탈한 폭동 사건은 한국 정당제의 치명적 실패 사례로 기록돼야 한다. 우리 정당들은 양쪽 공히 △의견 수렴 △갈등 조정 △대안 도출 등 소명을 무시해 왔다. 대중정당들이 이 책임을 방기하고 극단화를 부추긴 결과, 분노에서 촉발된 집단 에너지가 유튜브를 통해서만 무질서하게 분출된다. 강력한 로켓 엔진도 노즐만 제 역할을 하면, 원하는 방향·속도로 우주 공간 정확한 지점에 수톤 쇳덩이를 올릴 수 있다. 갈등의 가림막·필터·노즐 역할을 못한 정당들의 뼈저린 반성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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