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기사
동피랑 서피랑 디피랑… 그리고 이순신의 바다
이미 가입된 회원입니다.
만 14세 이상만 회원으로 가입하실 수 있습니다.
한산도 문어포마을 뒷산에 한산대첩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기념비 왼편 바다 건너에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었던 제승당이 있다.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어귀 혹은 배가 건너다니는 좁은 바닷목, ‘강구’의 사전적 의미다. 달리 말하면 강 같은 바다다. 항아리처럼 바닷물이 둥그렇게 파고든 통영항을 지역에서는 강구안이라 부른다. 통영 바다는 이처럼 육지와 섬 사이, 또 섬과 섬 사이로 강처럼 흐른다. 그 물목에 마을이 들어서고 도시가 형성돼 자연과 더불어 아름다운 풍광을 빚는다.
통영은 태생적으로 바다와 뗄 수 없고, 그러자면 충무공 이순신을 빼고 이야기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강구안에서 시장 골목을 통과해 약 400m만 걸으면 ‘삼도수군통제영’이 있다. 조선시대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 수군을 통할하는 본진으로, 줄여서 통제영이고 더 줄여서 통영이다. 최초의 통제영은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 당시 설치한 한산 진영이다.
지금의 통영 시내에 통제영을 지은 건 선조 36년(1603) 때다. 제6대 이경준 통제사가 터를 닦고 2년 뒤 세병관(국보), 백화당, 정해정 등을 세웠다. 고종 32년(1895)까지 292년간 유지되다가 일제강점기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을 제외한 대부분의 건물이 사라졌다. 근래에 관공서와 주택이 있던 통제영터 일부를 정비 복원했다.
통영 시내에 위치한 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규모가 가장 큰 목조건물로 꼽힌다.
통제영 세병관의 회랑. 궁궐 건물 못지않게 웅장하다.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세병관은 통제영의 객사다. 계단을 올라 중문을 통과하면 널찍한 마당에 웅장한 건물이 위용을 자랑한다. ‘세병관(洗兵館)’ 현판만 해도 어른 키를 훌쩍 넘는다. 제137대 통제사 서유대가 썼다.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의미의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왔다. 전쟁 없이 평화가 지속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넓은 마루에 열을 지어 세운 아름드리 기둥이 궁궐의 회랑 못지않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목조건물이다.
통제영을 사이에 두고 좌우에 작은 봉우리가 강구안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가파른 언덕에 벌집처럼 다닥다닥 살림집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동쪽 벼랑의 동피랑, 서쪽 벼랑의 서피랑이다. 없는 사람들끼리 서로 기대고 절벽 위에 꾸린 삶터가 이제는 강구안과 통영 바다를 내려다보는 멋진 전망대로 변신해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벽화마을로 널리 알려진 동피랑 마을.
동피랑 주변에 민가가 오밀조밀 밀집돼 있다. 동피랑 앞으로 강구안과 남망산이 보인다.
강구안 서쪽 서피랑에서도 통영 시내와 바다가 시원하게 조망된다.
서피랑 99계단에서 여행객이 인증사진을 찍고 있다.
동피랑이 먼저였다. 달동네의 축대와 담장마다 알록달록한 벽화가 그려지고, 좁은 골목을 양쪽으로 들어선 민가가 전망 좋은 카페와 공방, 기념품 가게로 변신했다. 언덕 꼭대기에는 동포루가 복원됐다. 숙종 20년(1694)에 세운 통영성의 초소 겸 망루다. 낮은 성벽 너머로 눈부신 쪽빛 바다와 아담한 포구가 정겹게 내려다보인다.
동피랑이 관광객으로 제법 분주한 데 비해 서피랑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하다. 앞쪽에는 동피랑처럼 99계단을 따라 주택이 오밀조밀 들어섰고, 뒤편은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동포루와 쌍을 이루며 언덕 꼭대기에 서포루가 복원돼 있는데, 이곳에서도 통영 시내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인다. 특히 해 질 녘 석양이 아름답다.
박경리는 소설 ‘토지’에서 통영항을 ‘항구 가득 정박한 작은 배들과 휘황찬란한 불빛이 경이로운 신천지’라고 묘사했다. 강구안 주변은 ‘한산대첩공원’으로 단장돼 있다. 작은 어선이 정박한 포구에 판옥선과 거북선이 복원돼 있고, 산책로 조형물은 충무공과 한산대첩의 의의를 되새긴다. 강구안 어선들은 항아리 목처럼 좁아지는 물목으로 드나든다. 바로 그 지점에 바다를 가로지르는 보행교가 놓였다. ‘강구안다리’라는 쉬운 말을 놔두고 굳이 ‘강구안브릿지’라 이름 지었다.
강구안 좁은 물목에 보행교가 놓였다. 다리는 오른편 남망산 자락의 통영시민문화회관으로 연결된다.
남망산조각공원의 정의비. 나뭇가지처럼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있다.
남망산조각공원에는 국내외 15명 작가의 작품이 설치돼 있다.
강구안 풍경과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다리를 건너면 통영시민문화회관으로 연결된다. 지그재그 덱 산책로를 따라 문화회관에 다다르면 초입에 나뭇가지처럼 자유롭게 두 팔을 벌린 소녀상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이들을 기리는 ‘정의비’다. 석상 주변에 김복득, 김기아 등 이 지역 출신 12명의 위안부 할머니 이력이 걸려 있다.
문화회관이 자리 잡은 곳은 남망산 자락이다. 해발 70m 남짓한 낮은 봉우리 전체를 조각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탐방로를 걷다 보면 국내외 열다섯 작가의 작품이 숲속에 숨어 있다. 시인 유치환과 김상옥, 서양화가 김용주를 기리는 시비와 조각도 만난다. 소설가 박경리, 화가 전혁림, 시인 김춘수, 음악가 윤이상 등 통영의 걸출한 문화예술인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힘들이지 않고 숲과 바다를 거닐고, 통영의 예술혼까지 음미하는 공원이다.
남망산조각공원의 호젓한 숲길.
남망산조각공원에서 한산도를 비롯한 인근 섬으로 연결되는 바다가 강처럼 보인다.
남망산조각공원 숲하늘길에서 보는 바다 풍경.
남망산조각공원은 밤이면 ‘디피랑’으로 변신한다. 동피랑과 서피랑의 벽화는 2년마다 새로 단장하는데, 지워진 벽화는 이곳 남망산에서 빛으로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디피랑은 1.3km 숲길에 밤마다 디지털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벼랑이다.
소나무(곰솔) 허리춤으로 연결된 ‘숲하늘길’을 걸어 정상에 오르면 이순신 동상이 서 있다. 허리에 찬 칼을 잡고 전방을 응시하는 표정이 단단하다. 정면 바다 건너 한산도가 보인다.
남망산조각공원은 밤이면 디지털 미디어아트가 펼쳐지는 디피랑으로 변신한다.
남망산 정상의 이순신 동상은 한반도를 응시하고 있다.
통영항여객터미널에서 한산도까지는 배로 20여 분 걸린다. 관광객이 주로 찾는 제승당까지는 관암항을 거쳐가기 때문에 약 30분이 소요된다. 제승당은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다. 조선 조정은 1592년 임진왜란 발발 후 여수에 전라좌수영 임시 행영을 설치했고, 이듬해 본영을 이곳 한산도로 옮겼다.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초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됐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후 옥포, 노량, 당항포 등 남해 바다 곳곳에서 왜적을 무찔렀는데, 한산대첩은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이순신에게 연전연패한 일본 수군은 1592년 7월 견내량(거제 사등면)에 70여 척의 전선을 포진시키고 반격을 준비했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5, 6척의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을 유인한 조선 수군은 학익진으로 역공을 펼쳐 적선 47척을 부수고 12척을 나포했다. 살아남은 왜적 400여 명은 근처 육지로 달아났다. 격전 중 조선 수군도 사상자가 있었으나 전선은 전혀 손실이 없었다. 완벽한 승리였다.
한산도 제승당으로 가는 길. 동백나무, 아왜나무, 적송 등이 어우러진 단아한 길이다.
최초의 삼도수군통제영이었던 한산도 제승당.
한산도 제승당 내부. 들어갈 수 없고 밖에서만 볼 수 있다.
제승당 수루 앞 바다에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그러나 1597년 칠천량해전 패배로 중심 건물인 운주당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소실되고 한산 진영은 폐지되고 말았다. 영조 15년에 이르러 조정은 충무공의 활약을 기리기 위해 운주당을 복원해 제승당이라 명명했다. 충무공이 부하 장수들과 작전을 논의하고 계획을 세우던 건물이다. 운주당(運籌堂)은 지혜로 계획을 세우는 집, 제승(制勝)은 제압하여 승리를 이끈다는 의미다.
선착장에 내려 제승당까지는 약 1km, 휘어진 해안을 따라 걷는다.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에 햇살이 부서지고, 정갈하게 가꾼 탐방로 주변에 아왜나무 동백나무 등 아열대 상록활엽수 잎사귀가 번들거린다. 아름드리 적송이 가지를 드리워 엄숙하면서도 단정하다.
이순신 영정을 모신 제승당 충무사.
도선이 물살을 가르며 제승당 앞 바다를 지나고 있다.
제승당 건물 내부는 밖에서만 볼 수 있다. 정면에 한산대첩도, 애국충정도, 사천해전도 등이 걸려 있고, 바닥에 임진왜란 때 사용한 지자총통을 전시해 놓았다. 중앙 두 개 기둥에 ‘맹산서해(盟山誓海) 욕일보천(浴日補天)’이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산에 맹세하고 바다에 서약해, 해를 목욕시키고 뚫린 하늘을 메운다’는 의미다. 전투를 앞둔 최고 지휘관의 결의와 국난의 위기를 극복한 이순신의 위대함을 칭송하는 문구다.
제승당 옆 바닷가 언덕에 그 유명한 수루(戍樓)가 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던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전투를 앞둔 장군의 인간적 고뇌를 읊은 한산도가가 걸려 있다. 불철주야 적군의 동태를 살폈을 근심 어린 바다에 이제는 관광객을 실은 유람선과 어선이 평화롭게 물살을 가른다.
한산도 한산대첩기념비와 제승당 사이 바다에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육지에 막힌 바다가 호수처럼 잔잔하다.
한산도와 다리로 연결된 추봉도 봉암해변은 낙조가 아름다운 몽돌해변이다.
통영 강구안 주변과 한산도 지도. 그래픽=이지원 기자
제승당뿐만 아니라 한산도는 섬 전체가 이순신과 한산대첩 유적이다. 한산면 소재지 진두마을은 진을 친 거점이었고, 고포마을은 군수용 소금을 구운 염포(鹽浦)가 염소를 뜻하는 고포(羔浦)로 변한 지명이다. 장곡마을은 군영에 필요한 숯을 공급했고, 창동마을에는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병기를 생산하는 풀무간이 있었던 야소마을, 군복을 짓는 피복창이 있었던 의암마을도 있다. 통제영 보급창이 있었던 하포마을, 수군이 해상훈련을 했던 장작지마을, 개미허리 지형의 수로에 왜군 잔당이 막혔다는 의항마을도 있다. 문어포마을 뒷산 꼭대기에는 한산대첩기념비가 높게 세워져 있다.
마을을 연결하는 한산도 해안도로를 한 바퀴 돌자면 차를 가지고 가야 한다. 통영항에서 3월 중순까지는 하루 7회, 그 이후에는 약 한 시간 간격으로 도선이 운항한다.
신고 사유를 선택해주세요.
작성하신 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로그인 한 후 이용 가능합니다.
로그인 하시겠습니까?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구독을 취소하시겠습니까?
해당 컨텐츠를 구독/취소 하실수 없습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