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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중고나라의 당근이세요?

입력
2025.02.20 22:00
26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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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는 새 물건 신봉자였다. IMF를 관통한 청소년기 때문인지, 아니면 팔자에도 없는 아나바다 운동을 하였기 때문인지, 검소하신 부모님 덕분인지는 몰라도, 새로운 물건을 보면 꼭 사야만 직성이 풀리고는 했다. 특히 나에게 옷이란 동네 언니의 언니로부터 시작되어 내 동생을 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을 뜻했는데, 아무래도 물려받은 물건이란 모름지기 부끄러움을 수반해야만 했고, 나는 그 옷을 입는 것만으로도 변명해야 할 것 같았다. 전혀 내 취향이 반영되지 않은 옷은 어쩐지 나를 볼품없게 만드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어릴 적 나의 꿈은 새 옷을 입고 새 물건을 사고 새 집에서 사는 '새것' 그 자체였다.

하지만 어려워진 재정상태로 인해 더 이상 새것만을 고집하는 데 한계를 느낄 즈음, 헌 물건의 매력을 알게 해준 것이 있었으니, 바로 당근마켓이다. 당근마켓이란 동네를 기반으로 한 일종의 커뮤니티 어플로 앞서 말한 물건의 나눔부터 재능 기부와 취미생활까지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특히 내가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중고거래'인데, 이 일은 동네 사람과 소통을 하고 물건을 가지러 가야만 하는 귀찮음을 수반하기는 하지만, 시세보다 저렴하게 원하는 물건을 얻었다는 성취감 역시 가질 수 있다. 나에게는 쓸모를 다한 물건이 누군가에게 기쁨이 된다는 것 자체로도 꽤 매력적인 행위이지만, 나는 앞의 이유를 차치하고 불편해서 아름다운, 그러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놓인 '소통'에 방점을 찍고 싶다.

나의 첫 당근은 책상 밑에 둘 발 받침대를 급히 구하는 일이었다. 갑작스러운 직거래임에도 불구하고 첫 당근이라고 말하니 그냥 가져가라며 주었다. 이후에는 물건에서 그치지 않고, 다육이를 무료 나눔 받기도 했다. 그는 베란다 가득 다육이를 키울 정도로 베테랑이었는데, 작은 화분을 받기로 했던 애초의 약속과는 다르게 자꾸만 더 가져가라고 하는 바람에 방 안에는 여섯 다육이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모두 당근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물론 받기만 한 것은 아니다. 나도 동네 아이들에게는 취미로 접던 종이접기 책과 색종이를 나누었고, 또래 친구들에게는 더 이상 읽지 않는 책들도 나누었다. 아마도 집에 있었다면 먼지를 뒤덮고 잊힐 물건들이었을 테지만 누군가에게 가서 쓸모가 된 것이다.

오늘도 당근마켓 상품 설명에는 물건과 그 물건을 가졌던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어떤 이유로 사고 어떤 이유로 떠나보내게 되었는지 다음 주인에게 당부하는 말들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오늘은 '이별 이슈로 싸게 내놓습니다. 쿨 거래 네고 가능'이라는 게시물에 한참 머물렀다. '이 물건은 나에게로 와서 무엇이 될까?' 궁금해진다. 역시 한 사람의 역사를 뒤집어쓴 물건을 내 집에 들인다는 것은 어쩐지 꽤 멋진 일인 것 같다.


이소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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