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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에도 탄핵된 대통령이 있었다

입력
2025.02.23 18:00
26면
1952년 7월 4일의 표결 장면. 부산정치파동으로 시작된 이승만 장기집권의 서막이 저렇게 열렸다.자료사진

1952년 7월 4일의 표결 장면. 부산정치파동으로 시작된 이승만 장기집권의 서막이 저렇게 열렸다.자료사진


1919년 세워진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 최초의 민주공화정이었다. 임시 의정원이라는 기구가 의회 역할을 했고,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선출했다. 초대 대통령은 외교를 통해 독립을 이루겠다는 이상을 가졌지만, 자주적인 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는 입장과 충돌하면서 임시정부는 많은 갈등을 겪었다. 이에 임시 의정원은 그가 독단적으로 행동하여 임시정부의 정체성과 원칙을 훼손했다고 판단해, 지금의 헌법재판소 역할을 하는 '탄핵심판위원회'를 설치하고 1925년 3월 23일 대통령을 탄핵·면직하는 결정을 내렸다. 정확히 100년 전의 일이다.

불명예스럽게 임시정부를 떠났던 대통령은 1945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 미군정 치하에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48년 제헌국회에서 다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그가 바로 이승만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 두 곳 모두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화려한 이력을 얻게 되었다.

그는 두 번째로 대통령 직을 수행하면서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의회와 불화를 겪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2년, 국회에서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고 재선 가능성이 희박해지자 대통령 직선제를 추진했다. 그러나 국회 반대로 좌초될 위기에 처하자, 임시수도 부산 시내에서는 민족자결단·백골단·땃벌떼 등 정체 불명의 청년 단체들이 관제 데모를 벌여 국회와 법원 청사를 포위·습격하는 혼란이 일어났다. 1952년 5월 25일에는 공비 소탕을 명목으로 부산 일대에 계엄을 선포하고, 측근이었던 헌병사령관을 계엄사령관으로 임명하여 반대파 국회의원들을 국제공산당과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체포·구금하는 폭거를 감행했다. 당시 우리 군은 유엔군과 함께 전방의 치열한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지만, 후방에서는 엉뚱한 권력 투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 친위 쿠데타 사건은 당시 임시수도였던 부산에서 일어났기에 '부산 정치 파동'으로 불린다. 이승만은 이를 통해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고, 1954년 사사오입 개헌으로 3선 연임까지 가능하게 함으로써 장기 집권의 길을 열었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은 강물 위에 번져가는 물결의 파동과도 같이, 사태를 경험했던 두 젊은이의 마음속에 깊은 공명을 일으켰다. 한 명은 육군본부에 근무하던 35세 청년 장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부산 영도에서 해운업을 하던 28세 청년 사업가였다. 청년 장교는 권력의 본질이 정당성이 아니라 '힘'에 있음을 생생하게 체득했다. 그때 그의 상관이었던 육군참모총장은 대통령의 부당한 명령을 거부하며, 군이 정치적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지만 결국 해임되어 권력에서 밀려났다. 청년 장교는 이 사건을 지켜보며 정치와 군대의 관계를 본능적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권력이란 '자격'보다는 '쟁취'의 문제이고, 한 번 놓치면 되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이후 군 내에서 점차 입지를 넓혀 갔고, 결국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했다.

반면, 목포에서 온 청년 사업가는 부산에서 이 사태를 직접 겪으며, 군과 경찰이 주권자의 의사가 아니라 권력자의 부당한 명령에 따라 움직이는 순간 민주주의는 쉽게 무너질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정계에 입문해 이승만 정권에 맞서며 의회주의를 신봉하는 정치인의 길을 걸었다. 군부 독재 시기에는 독재에 항거하다 감옥과 사형 선고까지 오갔지만, 결국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냈다. 1998년 대한민국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로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2000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리고 2025년 대한민국은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의회와의 불화를 겪은 대통령의 탄핵을 앞두고 정치적 격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12·3 불법계엄 사태를 바라보는 젊은이들도 갈라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선동에 휩쓸려 법원에 대한 폭동을 일으키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1952년 부산 정치 파동을 경험한 박정희와 김대중이 정반대의 길을 걸었듯이, 오늘날 이 사태를 지켜보는 이들도 저마다 다른 교훈을 얻게 될 것이다. '자유의 적'은 확실하게 벌을 받고, 우리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굳건해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고 또 바란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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