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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응급실 뺑뺑이'로 사망한 후, 풍비박산 난 가정··· 집·자동차도 경매에

입력
2025.02.22 12:00
수정
2025.02.22 12:18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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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의 이탈 1년, 환자·가족의 이야기]
거제 응급실 뺑뺑이 피해자 박동훈(가명)씨 가족

편집자주

2월 20일로 의대 증원에 반발해 전공의들이 이탈하면서 발생한 의료공백 사태가 1년이 됐다. 지난해 2∼7월 전국 의료기관에서 발생한 초과사망자 추정 인원은 3,136명. 한국일보는 전공의 파업 이후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와, 가족을 잃은 유족들을 만나 환자들이 겪어야 했던 지난 1년을 돌아봤다.

지난해 9월,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연우(가명·26)씨 가족이 바닷가에 놀러가 찍었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 박연우씨 제공

지난해 9월,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연우(가명·26)씨 가족이 바닷가에 놀러가 찍었던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 박연우씨 제공

작년 9월 6일. 박연우(가명·26)씨는 복막염 수술을 마치고 중환자실에 옮겨진 아버지에게 말했다. "올해는 기아가 우승할 거 같아요. 빨리 나아서 같이 보러가요"라고.

아버지는 야구를 무척 좋아했고, KIA 타이거즈의 팬이었다. 조선소 하청 노동자로서 힘든 일 때문에 야구장엔 자주 못 갔지만, 연우씨가 야구에 '입문'하면서 연우씨와 야구 중계를 보는 일을 무척 즐거워했다.

아버지는 애써 눈을 찡긋해 알겠다는 표시를 했다. "그게 마지막 인사라고 생각을 못했어요. 복막염은 사람이 죽는 병은 아니라니까···."

지난해 9월 병원 10곳에서 이송을 거부당해 복막염으로 숨진 박동훈(가명·당시 54)씨의 사망 진단서. 사인에 급성 복막염과 소장 천공이라고 적혀있다. 유족 제공

지난해 9월 병원 10곳에서 이송을 거부당해 복막염으로 숨진 박동훈(가명·당시 54)씨의 사망 진단서. 사인에 급성 복막염과 소장 천공이라고 적혀있다. 유족 제공

연우씨는 지난해 발생한 '경남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 유족이다. 아버지 박동훈(가명·당시 54)씨는 9월 5일 병원을 전전하다 14시간 만에서야 수술을 받을 수 있었지만, 8일 결국 숨졌다. 구급대원은 얼굴이 새빨갛게 되도록 전화를 돌렸지만, 병원 10곳이 모두 진료가 어렵다고 했다.

해당 사건이 보도되면서, 보건복지부와 경상남도가 철저한 진상조사를 약속했지만, 5개월이 지난 현재까지 아버지가 왜 그렇게 떠나야 했는지 설명을 해주는 곳은 아무도 없었다.

"11월쯤, (담당자들이) 서로 전화를 돌릴 뿐,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는 (저희가 겪은) 내용의 기사가 나가고서야 한 번, '조사가 마무리되면 알려주겠다'는 전화가 왔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혹시 우리 아빠가 왜 죽었는지 알수 있을까 해서 가끔 기사를 검색해보고 있었어요."

박연우씨는 지난해 9월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의 빚에 대한 한정승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박연우씨 제공

박연우씨는 지난해 9월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후, 슬퍼할 겨를도 없이 아버지의 빚에 대한 한정승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박연우씨 제공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화목하고 평범했던 연우씨 가족은 지난해 9월 이후 풍비박산 났다. 연우씨는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거나, 원인을 밝히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빚 독촉이 시작돼서다.

아버지는 거제 한 조선소에서 사내 하청 근로자로 일했는데, 두 남매가 대학에 들어갔을 때 조선업 경기가 어려워지며 빚을 져야 했다. 아버지는 개인회생 절차를 밟으며 빚을 갚아나갔지만 아버지 사망으로 이 과정이 모두 무효화되면서 채무가 유족을 압박했다.

연우씨는 계엄 사태로 시끄러웠던, 지난해 12월 이름도 낯선 한정승인(상속으로 얻은 재산의 한도 안에서 피상속인의 채무 등을 변제하는 것)이라는 걸 진행해야 했다. 법무사 비용으로 얼마 되지 않았던 부의금을 모두 털어 썼다. 인천에서 이사 온 연우씨 가족이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살아 정들었던 집도 경매로 넘겨야 했다. 집을 넘기고 지금은 다시 인천에서 살고 있다.

어머니에 대한 기초생활수급 신청도 알아봤지만 '근로 능력이 있는 딸과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경매 중인 자동차가 자산으로 잡혀 있어서 어렵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렇다고 일을 나갈 수도 없다. 아버지가 떠난 후 엄마가 공황장애와 우울증으로 일상생활이 어려워져 곁을 떠날수가 없어서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통장에 딱 100만 원 있는데, 마트 가서 한참 보다가 그냥 와요. 제가 뭐를 사고 싶어서가 아니라 쌀이나 계란 같은 거···, 그거 사면 이제 돈이 얼마밖에 안 남는데 싶어서."

지난해 9월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연우씨는 최근 아버지 차를 경매로 넘겨야 했다. 법원 직원들이 차를 인수해 가던 날, 연우씨가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앉던 운전대 좌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연우씨 제공

지난해 9월 '거제 응급실 뺑뺑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박연우씨는 최근 아버지 차를 경매로 넘겨야 했다. 법원 직원들이 차를 인수해 가던 날, 연우씨가 마지막으로 아버지가 앉던 운전대 좌석에서 사진을 찍었다. 연우씨 제공

연우씨는 최근 아버지와 두 번째 이별을 했다. 추억이 많았던 차를 경매로 넘기면서다.

"아빠가 그 차 사고 정말 좋아하셨거든요. 난생처음 자동차 동호회(더 뉴 쏘렌토 매니아)도 하고, 엄마랑 같이 부부동반으로 모임도 나가고. 저 면허 따고 운전 연수도 그 차로 했거든요. 장난으로 아빠한테 '이 차 나 줘' 하기도 하고."

연우씨는 장난처럼 했던 말이 그런 방식으로 이뤄질 줄은 몰랐다. 한정상속을 거쳐 경매로 빚을 변제하려면 연우씨로 명의 변경을 거쳐야 했기 때문이다.

법원 직원의 차량 인수 작업은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됐다. 법원 직원은 차를 한 번 둘러본 후 순식간에 번호판을 떼고 레커차(견인차)에 차를 올렸다. 연우씨는 법원 직원에게 부탁해 겨우 잠시 마지막으로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볼 수 있었다.

아버지는 이 차를 타고 연우씨의 늦은 하교길, 수능 시험을 보던 날, 대학 입학 날 등을 기다렸었다. 연우씨는 운전석에 앉아 아버지 손이 가장 많이 닿았던 핸들과 기어봉을 꼭 안아보고, 다시 한번 만져봤다고 했다. 그는 "아빠가 너무 아끼시던 차라 또 한 번 아빠를 떠나보내는 기분이 들어 너무 슬펐다. 아빠 차에 타고 운전하는 것 자체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사진을 찍어뒀다"고 말했다.

연우씨와 어머니가 현재 살고 있는 집 한편에는 7년 탄 차를 애지중지 손세차 할때 쓰던 아버지의 세차용품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연우씨의 아버지는 7년을 탄 쏘렌토를 무척 아꼈다. 아버지가 쓰던 세차용품(왼쪽)과 자동차 동호회 '더 뉴 쏘렌토 매니아' 스티커가 붙은 차 뒷유리 사진. 연우씨 제공

연우씨의 아버지는 7년을 탄 쏘렌토를 무척 아꼈다. 아버지가 쓰던 세차용품(왼쪽)과 자동차 동호회 '더 뉴 쏘렌토 매니아' 스티커가 붙은 차 뒷유리 사진. 연우씨 제공

지난 1년간 이어진 의정갈등 속 가족을 잃어야 했던 유족들이 언론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연우씨는 긴 인터뷰를 마친 후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까는 경황이 없기도 했고 저랑 엄마 얘기만 많이 드렸었는데···, 저희가 처음 피해 사실을 알렸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저희 아빠 일처럼 또 누군가에게 억울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이 커요. 전에 저희 이야기가 기사로 올라왔을 때 어떤 분도 '와이프가 똑같은 상황으로 중환자실에 있다'고 하시는 댓글을 봤는데···, 이런 일이 있었다고 제보해서 알린 사람도 있는 반면에 알리지 못했을 뿐, 저희처럼 똑같은 아픔을 겪고 있을 분들도 충분히 많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일이 더는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드리고 싶어요."

연우씨는 기자의 안내로 인천청년미래센터에 연계돼 가족돌봄청년 지원사업 신청 지원서를 제출한 상태다. 만약 대상자로 선정되면 △연 최대 200만원 자기돌봄비 지원 △(아픈 가족) 의료·돌봄 서비스 연계 △본인 교육장학금·일자리 등 필요 서비스 연계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또 가장(주소득자)의 사망·실직 등으로 위기에 처한 가정에 일시적으로 생계비·의료비·주거비를 지원하는 긴급복지제도가 있으니 이런 경우 주민센터를 가서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큰 희생에도 의료개혁 지지하는 환자단체

기자에게 의료 공백 피해 환자들을 소개해 준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국회도 언론도, 왜 의사와 정부 이야기만 하고 환자와 환자 가족들의 목소리에는 관심이 없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지난해 2∼7월 전국 의료기관에서 의정 갈등이 없었던 평시(2015~2023년)와 비교해 초과사망이 무려 3,136명 발생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환자단체는 여기서 정부의 의료개혁이 좌초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큰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성과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성주 대표는 "환자와 국민 중심으로 제도를 개선하겠다고 시작한 것인데, 입학 정원에 관한 문제들만 지금 화두가 돼서 마치 이 문제가 전체처럼 비춰지고 있다"며 "지난 1년간의 희생에도 모두 없던 일로 돌아갈까 봐 겁이 난다"고 했다. 이어 "환자는 아플 때 제때, 적절하게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면서 "독과점적인 구조와 의사 한 명이 하루에 몇 백 명씩 봐야 하는 상황이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원다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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