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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의 시간은 느리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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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2월의 마지막 날이다. 서른 날을 못 채우고 마무리되는 유일한 달. 새 학년이 시작되기 전 2월은 겨울과 봄 사이에 슬쩍 끼워져 늘 어물쩍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 2월을 선명하게 해주는 기억이 바로 졸업식이다. 북적이는 운동장에서 찍은 사진 속의 나는 꽃을 안은 채 몸을 잔뜩 웅크렸지만, 표정엔 정든 사람과 공간을 떠나는 서운함과 새로운 시작을 위한 막연한 희망이 공존했다. 그 사진 속 시간만으로도 2월은 화사했던 다른 달들보다 더 의미 있는 기억으로 남아 있다.
1분, 한 시간, 하루, 그리고 한 달이라는 물리적 시간은 따박따박 흘러간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물리적 시간을 살지 않는다. 어떤 몇 년은 스르르 흘러가 버리고, 어떤 짧은 순간은 일생에 가장 강렬하게 남는다. 치렁치렁한 졸업 가운과 어색하기만 한 학사모지만 그 일상적이지 않은 예복들은 우리를 특별하게 기억될 시간 속으로 들여보낸다. '우리의 삶은 이런 세리머니들의 징검다리를 건너가는 것과 같다'고 하셨던 교양과목 교수님의 말씀이 여전히 생생한 것을 보면, 그 강의 시간도 나에게는 단지 3학점 이상의 무게로 남았나 보다.
물리적 시간과 경험된 시간, 기억된 시간은 정말 다를까? 아니면 몇 시간이 찰나 같고,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것은 단지 말의 표현일 뿐일까? 2008년 미국 인지심리학자 이글만 팀은 극한 경험 중에는 시간이 정말 슬로비디오처럼 지나가는지 알아보고자 엉뚱한 실험을 고안했다. 참가자들은 46m 높이에서 번지점프처럼 뛰어내리는데, △뛰어내리기 전 낙하에 걸릴 시간을 상상해 스톱워치로 측정한 시간과 △떨어지고 나서 낙하 경험을 기억해 측정한 시간을 비교했다. 그 결과 사람들은 낙하 후 기억한 시간을 평균 36% 더 길게 보고했다. 실제 슬로비디오처럼!
하지만 손목에 찬 LED 패널에서 빠르게 깜빡거리는 숫자가 무엇인지에 대한 보고 정확성은 낙하 전과 낙하 중에 다르지 않아, 극한 경험 중 시간에 대한 인식 자체가 더 정밀한 것은 아님을 보여주었다. 만일 날아가는 새의 날개 움직임을 슬로모션으로 볼 때처럼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다면, 낙하 중 숫자를 더 잘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것처럼 기억하게 하는 강렬한 경험은 두렵고 불안한 것에만 해당하진 않는다. 최애 아티스트의 공연장에서 실제로 연주를 듣는 꿈같은 시간, 소중한 사람을 처음 만나던 시간도 느리게 기억된다. 그 사람이 만남의 장소로 걸어 들어오는 순간 시간이 세 배 느려지며, 발걸음의 각도, 찰랑대던 머리, 스르르 올라가던 입꼬리까지 세세하게 '보이던' 것은 그 경험이 주는 특별한 느낌의 기억에 있다.
2025년 2월이 가고 있다. 함께 겪고 목격한 시간에 대한 극단적으로 다른 입장이 한 거리 안에도 가득했던 우리의 한 달은 어쩌면 아주 느리고 길었던 시간으로 기억될 것 같다. 우리에게 주어진 물리적 시간은 각자에게 유한하지만 우리가 사는 시간, 우리의 기억에 남을 시간의 속도와 길이는 그 시간을 어떤 의미와 감정으로 채우는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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