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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책은 늘 너무 늦다

입력
2025.03.09 22:00
26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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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기억은 물건으로 각인된다.

지인 딸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정장을 꺼내 입다가 옷장 속에 딸린 작은 서랍을 열었다. 평소에는 거의 착용하지 않는 목걸이와 반지, 스카프 같은 장신구를 넣어두는 수납장이다. 결혼식장 하객으로 가는 자리인데, 검정 원피스에 검정 코트만으로는 아무래도 칙칙할 성싶었다. 목걸이라도 하면 좀 나으려나. 오랜만에 열어 본 장식장 안에서 네잎클로버 모양 큐빅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 하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지금껏 내가 한 번도 목에 걸어본 일이 없는, 아주 오래전 어떤 이가 떠안기듯 주고 간 물건이었다.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28년 전 이른 봄에 한 번 만난 게 고작이었다. 그즈음 문예지 편집자로 일하던 내게 원고 하나가 전해졌다. 보통 투고자들은 수신자를 ‘ㅇㅇ출판사 편집부’나 ‘투고원고 담당자 앞’이라 표기한다. 한데 그 원고를 보낸 이는 ‘지평님 차장님께’라고 수신자를 특정했었다.

투병기였다. 회복 가망이 없는 병을 앓게 된 어느 여성이 수시로 찾아오는 몸의 통증과 감정의 격랑을 견뎌내며 일 년 가까이 써 내려간 산문 모음이었다. 그때 살아갈 날이 새털같이 많던 20대 후반의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홀로 맞닥뜨려야 했을 공포나 분노, 막막함이나 체념을 헤아리기에는 턱없이 어렸던 것 같다. 눈물을 쏟으며 원고를 읽다가도 ‘이 사람은 왜 나를 콕 집어서 이리도 불편한 감정을 전이시키는 걸까?’ 생각했었다. 다음 날 전화를 걸었다. 보내주신 원고를 읽었노라고, 다만 책으로 싣기는 어렵겠다고 다소 건조하게 전하는 내 독후감에도 그는 실망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그가 나를 만나러 회사 쪽으로 오겠다고 했다. 당혹스러웠지만 긴 시간 빼앗지 않겠다고 나직하게 말하는 그를 뿌리칠 수는 없었다.

약속 장소인 회사 근처 미술관으로 갔다. 막 피어나는 목련 꽃들 사이로 흰색 원피스 차림의 깡마른 중년 여성이 서성이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눈에 띄는 미인이었다. 그 모습을 살피며 다가가던 한순간, 목구멍이 턱 막힐 듯 격한 슬픔이 몰아쳤다. 눈물을 꾹꾹 참으며 내 감정을 수습하는 일에만 골몰했던 탓일까. 미술관 옆 카페에 앉아 그와 주고받았던 대화 내용이 흐르는 물에 씻겨나간 수묵화 형상처럼 흐릿하게 남고 말았다. 그의 이름조차 이내 잊었다. 다만 헤어지기 직전 이 목걸이가 든 상자를 그가 내게 건넸으며, 목걸이는커녕 반지도 팔찌도 귀고리도 하지 않는다고 손사래 치는 나에게 “너무 완강하게 거절하면 내가 슬퍼져요”라며 처연하게 웃던 그의 얼굴만 내 머리에 아프게 새겨졌다. 그래서 나는 이 목걸이를 목에 걸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의 마지막 일기와도 같던 원고를 왜 하필 내게 보냈던 건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내어 내게 들려주려 했던 이야기는 또 무엇이었는지를 또렷이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손바닥에 올려둔 목걸이를 한참 바라보았다. 큐빅 네잎클로버 위로 눈물이 떨어졌다. 다시 또 너무 늦은 자책들. 그날 그이의 이야기에 조금만 더 귀를 기울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이의 마음에 한 뼘만 더 다가갔더라도 두고두고 후회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곧 큐빅처럼 꽃잎들 흩날리는 봄이 오고 나는 오래전 만났던 어떤 사람을 기꺼이 추억할 수 있었을 텐데….


지평님 황소자리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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