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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신이 된 어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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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편집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
이희자(오른쪽)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가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 앞에서 야스쿠니신사에 합사된 한국인 유족의 패소 판결을 규탄하고 있다. 도쿄=류호 특파원
"고 기자, 어떻게 지내?" 작년 연말, 휴대폰에 저장되지 않은 번호라 당황했다. 상대의 정체를 가늠할 새도 없이 다음 말이 스몄다. "그때 많이 썼네, 스크랩 보다가 생각이 났지." 뇌리를 채운 씩씩한 목소리가 추억을 깨웠다. 태평양전쟁피해자보상추진협의회 공동대표 이희자(82), 그 이름이 호출한 심정은 반색보다 미안에 가깝다. 기억은 흐리지만 감정은 또렷하다.
2001년 이맘때 '일본 야스쿠니신사, 한국인 합사' 관련 취재를 하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낙종을 만회하려 애쓰던 차였다. "하도 찾아오니까 귀찮고 불쌍한 마음에 (기삿거리를) 줬다"는 게 이 대표의 농 섞인 회상이다. 고작 경력 1년 차에 벼락공부로 완성한 취재 내용을 글로 풀었다. 1면 머리기사, 2면 칼럼(기자의 눈), 3면 전체, 사회면 스케치 기사까지 하루에 다 쓰느라 25년 기자 생활에서 가장 정신 없던 날 중 하나로 꼽는다. 따로 스크랩한 당시 지면엔 더 제대로 쓰지 못한 회한이 빨간 줄과 휘갈긴 글씨로 남아 있다.
첫 취재 때 낯설었던 합사는 '둘 이상의 혼령을 모아 한곳에서 제사 지낸다'는 뜻이다. 태평양전쟁 등에 참전했다가 숨진 246만여 명의 혼령을 1959년 한 덩어리의 신으로 합사한 곳이 야스쿠니신사다. '전사했을 때 일본인이었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일본인'이라는 억설로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국적을 회복한 한국인 2만여 명도 합사했다. 유족에게 알리지도, 동의를 구하지도 않았다. 유족의 취소 요구에 일본 정부는 '권한이 없다', 신사는 '혼령들이 한 덩어리로 신이 돼 따로 뺄 수 없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생전에 강제로 끌려간 어버이가 사후에 무단으로 일제 침략 전쟁의 미화 수단이 된 꼴이다.
관련 기사를 한 달 넘게 썼다. 덕분에 그해 광복절, 유족들의 야스쿠니신사 항의 방문에 동행했다. 현장에서 "조선인은 물러가라"는 일본 우익단체 회원들의 광기를 목도했고, 한편으로 유족을 물심양면 돕는 시민단체 등을 통해 일본의 양심을 확인했다. "일본이여, 살아남은 자의 절규를 들어라"는 유족의 함성을 기사에 담았다. 역사를 바로잡자고 양국의 양심이 의기투합했다.
출입처를 옮겨 다니느라 굳은 약속을 흘렸다. 그사이 첫 번째 합사 취소 소송은 패소했다. 2017년 이 대표가 통화로 알린 합사 유가족의 증언집 '빼앗긴 어버이를 그리며' 출간 취재를 후배 기자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그나마 이어지던 연락도 끊겼다. 2019년 인도네시아에서 '화장실로 변한 일본군 위안소' 현장을 취재하면서 이 대표가 떠올랐으나 연락할 마음만 먹고 말았다.
올 1월 17일 일본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가 유족 27명이 2013년 제기한 '야스쿠니신사 무단 합사 취소 소송'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5분 만에 끝난 재판의 기각 사유는 "제척 기간(20년)이 지나 소송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게 전부였다고 류호 도쿄 특파원은 전했다. 합사 시점을 따져 1979년 이전에 소송을 내야 했다는 논리다. 아무도 알려주지 않아 유족이 일본 신문 등을 뒤져 가족의 합사 사실을 확인한 시기가 1990년대 후반인 걸 감안하면 궤변이다.
3·1절을 맞아 이번엔 먼저 전화했다. 그는 여전히 씩씩했다. "시국이 이래서 아무것도 못 하고 있지만 대를 이어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부디 잊지 말라'는 당부로 들렸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막말이 난무한 분열의 3월 광장이 착잡하다. 겨레의 연대를 앙망하며 되뇐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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