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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도 9월 11일 자부심을 느꼈나요"... 파키스탄계 미국인이 혐오를 이길 방법은

입력
2025.03.08 04:3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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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아야드 악타르 장편소설 '홈랜드 엘레지'

2001년 9월 11일 항공기가 들이박은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꼭대기 층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2001년 9월 11일 항공기가 들이박은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꼭대기 층에서 연기가 솟아오르고 있다. 뉴욕=AP 연합뉴스

"당신 어디서 왔어?"

"업타운이요."

"아니, 어.디.서. 왔느냐고? 당신 무슬림이야?"

2001년 9월 11일, 이슬람 극단주의 조직 알카에다가 공중 납치한 항공기로 미국 뉴욕 다운타운의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한 날. 파키스탄계 미국인 작가는 테러 현장 인근 병원을 따라 늘어선 헌혈 대열에 섰다가 노골적인 악의와 마주했다. "우린 아랍인 피 필요 없어" "이 염병할 테러리스트!"

퓰리처상 작가의 자전 소설

11년 후 이 작가가 쓴 희곡 '수치'가 뉴욕의 무대에 올랐다. 작품 속 파키스탄 출신 미국인 변호사는 "비행기가 쌍둥이 빌딩을 들이받았을 때 자부심을 느꼈느냐"는 질문에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고 답한다. "미국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고 더했다. 9·11 테러 이후 부쩍 강화된 이슬람 혐오와 그로 인한 미국인 무슬림의 정체성 혼란을 그린 이 작품으로 작가는 이듬해 퓰리처상을 탔다. 그러자 또다시 쏟아진 질문들. "당신도 9월 11일에 자부심을 느꼈나요?"

최근 출간된 미국의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아야드 악타르(53)의 자전적 장편소설 '홈랜드 엘레지'의 한 대목이다. 작품 속 화자 역시 작가와 같은 이름을 가진 미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소설은 악타르의 실제 경험과 허구, 픽션과 논픽션이 뒤섞여 있다. 작가 악타르와 소설 속 악타르, 2001년 미국인 정체성에 내상을 입은 악타르는 거의 모든 면에서 겹쳐진다. 저자는 소설임을 강조하면서도 책의 서두에 미국 만화가 앨리슨 벡델의 말을 인용해 놓았다. "나는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지어낼 수 있다."

무슬림 미국인의 정체성 혼란을 그린 희곡 '수치'로 2013년 퓰리처상을 받은 파키스탄계 미국인 극작가 겸 소설가 아야드 악타르. 악타르 페이스북 캡처

무슬림 미국인의 정체성 혼란을 그린 희곡 '수치'로 2013년 퓰리처상을 받은 파키스탄계 미국인 극작가 겸 소설가 아야드 악타르. 악타르 페이스북 캡처


무슬림 미국인의 정체성 딜레마

악타르는 뉴욕 스태튼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파키스탄 출신 이민자였다. 미국이 개발도상국 출신 의사들을 파격 조건으로 대거 영입했던 1960년대 후반 파키스탄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왔다. 1990년대 당시 40대였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심장 주치의를 잠시 했던 부친은 '아메리칸 드림'의 신봉자다. 이들의 미국적 삶과 정체성은 9·11 테러와 이후 '트럼프 시대'를 통과하면서 뿌리째 흔들린다.

악타르의 부친은 자신의 정체성을 저버리면서도 반(反)이민 기조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에게 2016년 대선 때 기꺼이 표를 던졌다. 반면 그의 어머니는 파키스탄 쪽에 좀 더 치우친다. 특히 파키스탄에서 테러리스트 스파이로 몰린 첫사랑이 암살당한 이후 반미 감정을 품게 된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죽음의 배후라고 의심한다. 희곡 속 대사 "미국은 그런 일을 당해도 싸다"는 실제 어머니의 말을 옮긴 것이다.

고속도로 주행 중 차가 고장난 악타르는 단지 피부색이 갈색이라는 이유로 경찰로부터 잠재적 테러 용의자 취급을 받는다. 출신지에 대한 질문을 받을 때는 습관적으로 발리우드 영화와 요가가 떠오르는 인도라고 답한다. "만일 이 모든 이야기가 피해망상처럼 들리는 독자가 있다면 그의 행운에 축하를 보내고 싶다. 분명 공화국의 일원이기보다 그 적으로 인식될까 봐 걱정에 시달리는 일상을 보낸 적이 없었을 테니까."

악타르는 훗날 자신과 같은 배경의 파키스탄계 미국인 여자친구 아샤에게 어렵게 털어 놓는다. 2011년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구세군 중고품 가게에서 훔친 십자가 목걸이를 한동안 목에 걸고 다녔다는 것을.


홈랜드 엘레지·아야드 악타르 지음·민승남 옮김·열린책들 발행·520쪽·1만9,800원

홈랜드 엘레지·아야드 악타르 지음·민승남 옮김·열린책들 발행·520쪽·1만9,800원


삶을 파괴하는 미국 사회의 본질은

악타르가 간파한 미국의 본질은 "인종차별과 배금주의"로 꿰어진다. 소설은 악타르가 월스트리트 헤지펀드 설립자인 무슬림 리아즈의 도움으로 부를 거머쥐게 되는 과정을 통해 약탈적 자본주의의 면모를 보여준다. 백인 상류 사회에 한발 들이게 된 악타르는 자본주의적 성공에 얽힌 욕망을 거부하지 못한다. 돈은 이편 저편 가리지 않는다. 흑인이지만 버락 오바마가 아닌 공화당에 투표하는 한 등장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무언가를 바꾸려면 그 방법밖에 없어. 돈." "백인이 세운 정부는 흑인들에게 해를 끼칠 것"이기에 미국 정부에는 세금을 낼 수 없으니 세금을 줄이겠다는 후보에게 표를 주겠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잘 이해되진 않는다.

책의 말미에 악타르는 한 나이 든 백인 남성으로부터 "여기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왜 떠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아 든다. 악타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건 여기서 태어나 여기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내 고향입니다." 따지고 보면 미국 주류를 칭하는 와스프(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 역시 유럽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이다.

권영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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