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보

단독

왕십리 똥파리, 자동차 고사를 아십니까... '응답하라, 서울'

입력
2025.03.08 10:00
10면
구독

[책과 세상]
유승훈, '서울시대'

1971년 6월 찍힌 서울 성동구 금호동 일대 판자촌.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1년 6월 찍힌 서울 성동구 금호동 일대 판자촌. 한국일보 자료사진

계엄, 탄핵, 대선 등 거시사에 지친 독자라면 반갑게 집어들 책이다. 미처 몰랐던 당대의 세태도 시간이 흐르면 역사가 된다. 미시사를 기록하는 데 탁월한 솜씨를 보여온 민속학자 유승훈이 이번엔 서울 미시사로 돌아왔다. 서울은 그가 2004년 부산으로 떠나기 전까지 태어나 자란 고향이다. 저자는 부산 미시사를 담은 '부산은 넓다'(2013년), '부산의 탄생'(2020년) 등을 냈다.

그의 신간 '서울시대'는 서울의 눈부신 발전상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왕십리 똥파리, 강남 복부인, 자동차 고사 등 사소한 생활에 밀착한다. 저자는 자신의 역할을 "거시사에 역사의 안방을 내주고 건넌방에 조용히 앉아 있는 미시적 풍속을 끄집어내 해석해 보는 일"이라고 소개한다.

혼종의 '서울시대'

1962년 서울 채소밭에서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기록원 제공

1962년 서울 채소밭에서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고 있다. 서울기록원 제공

"혼종의 시대". 저자가 '서울시대'로 명명한 1960~1990년대 서울의 특징이다. 전후 폐허를 딛고 급격히 경제 성장을 이룬 당시 서울은 수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대한민국 개발 시대의 상징이자 축소판이었다. 이촌향도와 산업화로 서울로 인파가 몰리면서 과거와 현재, 농촌과 도시가 뒤섞이며 풍속도 뒤죽박죽이었다. 책은 난방, 주거, 교통, 교육, 결혼, 장례 등 작고 구체적인 생활의 단면들로 혼종의 시대였던 서울을 알려준다.

현대적 주거 방식의 시작인 아파트가 등장할 때도 한국은 푸세식 화장실이 표준 생활 방식이었다.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델하우스가 개관하던 1971년으로부터 불과 2년 뒤인 1973년, 서울 화장실의 수세식 비율은 약 8.7%에 그친다. 푸세식 화장실에서 퍼 올린 서울 장안의 인분은 왕십리 인근에 넓게 펼쳐진 채소밭의 거름으로 쓰였는데, 냄새가 얼마나 지독한지 "왕십리 사람들은 똥 냄새를 하도 맡아 인이 박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다. 인근만 가면 새까맣게 똥파리들이 몰려드는 통에 '왕십리 똥파리'라는 말이 탄생했다.

1972년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델하우스 개관식.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1972년 서울 여의도 시범아파트 모델하우스 개관식. 서울역사아카이브 제공

'자동차 고사'라는 독특한 문화가 생긴 건 1980년대 전후다. 본격적인 '마이카 시대'를 맞이했을 때다. 최첨단 기계인 자동차 앞에 돼지머리와 시루떡을 놓고, 혹은 목탁을 두드리면서 염불을 외며 고사를 지내는 풍경은 하루가 멀다 하고 반복됐다. 자동차 고사의 배경엔 자동차 대중화로 '교통사고 왕국'이 돼 버린 어두운 시대상이 있다. 1978년 서울에서만 한 해 3만 건이 넘는 교통사고가 발생했다. 교통사고 사망자 수는 1,000여 명. "성장과 성장통이, 발전과 후유증이 공존하는 시간"이었다.

'서울시대'의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유승훈 부산근현대역사관 운영팀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시대'의 작가이자 민속학자인 유승훈 부산근현대역사관 운영팀장. 한국일보 자료사진


2020년대는 어떤 시대로 기억될까

지난달 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뉴스1

지난달 7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뉴스1

천지개벽을 거듭한 서울에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부동산과 교육에 대한 들끓는 욕망. 교육열이 밀어올린 집값은 전례 없는 초저출생이라는 후유증을 가져왔다. 지난해 한국의 합계출산율(가임 여성 1명당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은 0.75고, 이 중에서도 서울은 0.58로 전국 최저다. 신입생이 반토막 난 초등학교가 속출하고 있다. 20년 전 신입생이 238명이었던 서울 한 초등학교의 올해 신입생은 105명에 불과했다.

1970년대 공공장소에 붙었던 가족계획 포스터.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1970년대 공공장소에 붙었던 가족계획 포스터. 국립한글박물관 제공

"시대는 풍속이 되고, 풍속은 시대가" 된다. '임장' '코인' '1인 가구' '7세 고시' 'SNS 중독' 등으로 점철된 2020년대의 생활상은 후대에 어떻게 기억될까. 대학생 시절 소설가를 꿈꿨다는 저자의 필력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한다. 책의 첫 장 '왕십리 똥파리와 기생충 박멸'은 이렇게 시작한다.

"난데없는 이 주제에 오감이 불편해질 수도 있겠다." 책에 실린 포스터, 사진 등 115장의 자료가 당대 서울살이를 생생히 되살려낸다. 책으로 읽고 보는 '응답하라' 시리즈 같다. 저자는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으로 제53회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서울시대·유승훈 지음·생각의힘 발행·392쪽·2만2,000원

서울시대·유승훈 지음·생각의힘 발행·392쪽·2만2,000원


송옥진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